1994. 12.『東洋哲學硏究』14


雲湖 任靖周의 理氣心性論


金    炫


  1. 머리말

  2. 生涯

  3. 思想的 淵源

  4. 思想的 特色

  5. 맺음말


  1. 머리말


  雲湖 任靖周(1727-1796)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氣一元論으로 이름을 남긴 鹿門 任聖周(1711-1788)의 아우이다. 그는 학문적으로는 녹문의 사상을 계승하여 心의 도덕 실천 능력을 밝히는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세자를 보도하는 경연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매우 진취적인 경세관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임정주의 학술에 대해서는 張志淵이 <<朝鮮儒敎淵源>>에서 성리학에 매우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소개하였고,1) 玄相允도 <<朝鮮儒學史>>에서 그가 녹문의 학문을 이어받아 主氣說을 주장했다는 기록을 남겼다.2) 그들의 소개로 인해 운호는 일찍부터 儒學史에 등재되기는 하였으나 인물 소개 이상의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학문이 철저히 형 녹문의 이론을 따른 것이어서 연구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녹문은 운호에게 있어 16년 터울의 친형이었을 뿐 아니라 학문과 덕행을 훈도한 스승이기도 했다. 더우기 운호는 매우 독실하게 형의 이론을 이해하고 좇았기 때문에 적어도 성리학의 이론면에 있어서는 양인의 학문은 한 가지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결국 운호의 학문은 녹문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독창적인 면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사실 문집을 통해 알 수 있는 운호의 성리설 가운데 녹문이 표출하지 않은 새로운 견해가 있다거나 녹문의 이론 가운데 미진한 부분을 그가 완성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어쩌면 녹문이 피력한 성리설이 당시로서는 워낙 이채로운 것이어서 더 이상의 창신은 필요치 않았을 수도 있다. 오히려 형이 도달한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만 해도 그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운호가 녹문의 철학을 이어받아 이룩한 것을 창신이나 발전에서 찾기보다는 정리와 반성을 통해 그들의 철학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찾는 것이 좋을 듯하다.

  녹문의 철학 속에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인 과장이나 비약이 얼마간 섞여 있다고 한다면, 운호의 사상은 이미 녹문에 의해 틀이 잡힌 내용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시 검토하고 정리했다는 점에서 문제의 핵심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녹문의 死後 그가 남긴 글들을 후학들이 보고 많은 비평을 가하였는데, 운호는 그와 같은 비평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학설을 옹호하고 해명하는 책임을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와 같은 과정에서 녹문․운호 철학의 요점과 특징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운호는 일찌기 張志淵도 밝혔듯이 그의 주변의 학인들 사이에서는 학술적으로 높은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으며3) 특히 녹문의 독특한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고 소화시킨 거의 유일한 계승자였다. 이 점에서 운호의 학술 이론을 캐어 보는 것은 이미 朝鮮儒學史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녹문의 철학적 성격을 재정리하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生涯


  雲湖 任靖周는 그는 1727년(英祖 2년)에 함흥 판관을 지낸 任適(1685-1728)의 5남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당시 그 집안의 거주지였던 서울이었으나 운호의 출생 직후 부친이 사망하자 청주로 거주지를 옮겨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11세 때에는 여강으로 17세 때에는 다시 서울로 이거하였다. 그는 36세인 1762년(영조 38년)에 司馬試(生進科)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뽑히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46세인 1772년에 세자(正祖)의 경호를 담당하는 翊衛司에 들어가 시강에 참여하였고 侍直(정8품)으로 승진하였으나 1776년 세자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몇 년 동안 관직을 떠나 있다가 59세 때(1785)에 典牲署 主簿(종6품)의 직을 맡았고  다음해(1786)에는 외직으로  나가 松禾縣4)의 원이 되었다. 61세 때에는 溫陵5)令(종5품)의 직을 맡았다가 다시 지방관으로 나가 靑山縣6)의 원이 되었다. 그는 靑山 縣監으로 있는 동안 그의 형 녹문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곳에서는 또 善治를 행하였다고 보고되어 왕의 특명으로 資品을 더해 받고 中樞의 직함을 받았다. 1796년(정조 20년)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글을 모은 문집 <<雲湖集>>은 1817년(순조 17년) 그의 아들 任杰에 의해 6권 3책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3. 思想的 淵源


  운호의 성리설은 대부분 그의 형 녹문의 학설을 계승한 것이므로 운호의 학문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녹문의 사상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녹문 임성주가 당대 학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또 후대까지 이색적인 이론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주자학의 理氣二元的인 구도를 부정하고 氣一元論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이른바 理氣二元이니 氣一元이니 하는 것은 녹문의 철학이 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녹문이 평생 그의 학문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그가 그의 스승 陶庵 李縡(1680-1746)로부터 물려받았던 ‘心說’, 즉 인간의 구체적 정신현상의 主宰인 心이 도덕을 실현할 수 있는 순수하고 역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능력은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성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되어 온 ‘性善’을 단지 理의 善으로만 이해하고 氣로 이루어진 心은 有善有惡으로 이해할 경우 선을 행한다고 하는 인간의 도덕 능력은 단지 가능성에만 그치게 될 뿐임을 그는 경계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도덕 능력을 性만이 아닌 心의 차원에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연원은 녹문을 지나 그의 선배인 巍巖․南塘․陶庵․屛溪 등의 인물에까지 소급되어진다. 일찌기 巍巖과 南塘은 人性과 物性의 同異 문제에 대해 격론을 벌였는데, 그들의 논변은 단순히 人性과 物性이 같으나 다르냐의 논의에 그치지 않고 未發 상태의 심체가 純善하냐 아니냐의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그 문제가 陶庵과 屛溪에게로 이어진 이후에는 心의 虛靈不昧함이 聖․凡에 따라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가 야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南塘 韓元震(1682-1751), 屛溪 尹鳳九(1681-1767) 등의 호서지역 학자들 취했던 입장은 性이란 어디까지나 氣質로 인하여 특수하게 구체화되는 개개 사물의 특성을 지칭하는 것인 만큼 만물은 각기 다른 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7) 인간의 心은 구체적인 정신현상의 토대로서 氣에 속하는 것인데, 그 氣에는 淸濁不齊의 차이가 있으므로 비록 정신현상을 발현하기 이전의 未發心의 상태라도 거기에는 善의 요소와 惡의 요소가 병존한다는 것이요,8) 같은 人類라 할지라도 氣質의 淸濁不齊한 차이가 있는 만큼, 氣로 인해 구체화된 心體의 차등을 인정할 수가 있고, 결국 聖人과 凡人의 心性은 서로 다른 면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9)

  이들의 주장은 理를 보편적 가치의 가능적 원리로, 氣는 그 理의 가능성을 현실화 하는 자발성을 가진 질료로 보는 理氣二元論의 기본 입장에 근거하여 모든 구체적인 것은 氣의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물의 ‘性’, 인간의 ‘心’ 등은 보편적인 理와는 구별되는 ‘구체성’을 띠고 있는 것이며, 그 구체성의 발현은 반드시 ‘氣’의 작용을 매개로 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담긴 하나의 문제점은 이 구체성의 토대인 氣는 淸濁不齊한 것이므로, 그것에 의해 구체화되는 인간의 心도 淸氣에 의한 선한 일면과 濁氣에 의한 악한 일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보는 점이다.

  이들의 이같은 주장에 반대한 巍巖 李柬(1677-1727)은, 인간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존재는 陰陽五行의 氣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지만 그것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그 氣에 영향받지 않은 순수한 理만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또한 그러한 理는 사물에 따라 차이가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였다.10) (人物性同論) 아울러 그는, 인간의 도덕성 발현의 주체가 되는 心(明德)은 비록 그것이 氣에 의존하고 있다고는 하나, 淸濁不齊한 氣稟과는 엄격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스스로 氣稟의 血氣를 물리치는 주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11) (未發心體本善說)

  녹문과 운호의 스승인 陶庵 李縡는 屛溪의 문제 제기에 의해 뒤늦게 이 논쟁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그가 취한 입장은 외암의 편을 들어 未發心體의 純善과 그것의 聖凡同一을 주장한 것이었다.  陶庵은 南塘과 屛溪가 氣의 淸濁不齊함에 집착하는 것을 꼬집어 그들의 심론을 ‘明德分數說’이라고 지칭하고 明德의 不齊를 인정하는 그와 같은 논리를 따르면 孟子가 性善을 주장한 뜻이 어둠 속에 매몰되고 말 것이라고 경계하였다.12)  도암의 이와 같은 입장은 자연스럽게 그의 제자 녹문에게 계승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녹문의 철학은 남당․외암․병계․도암 등의 학자들 사이에서 문제시되었던 心體의 純善性 문제에 대한 답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잉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녹문은 심의 순선성을 확보하기 위해 심을 이루는 氣의 순선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純粹와 雜駁을 理․氣에 분속시키는 理氣二元論的인 구도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理․氣의 개념이나 그 先後 문제는 녹문의 궁극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가 氣一元論을 주장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一原을 理에만 돌리고 氣를 分殊로만 이해하는 종래의 성리설에 반발하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쓴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理․氣의 위상을 전도시켜 理를 氣에 예속시키는 따위의 일은 그의 학문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心과 性을 이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理․氣의 차별성보다는 일치성을 강조했을 뿐이다.

  녹문은 자기 사상의 요지를 ‘理氣同實, 心性一致’라는 두 마디 말로 대변하였는데,13)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후자인 心性一致이며 理氣同實은 心性一致를 확립하기 위한 전제로서 요청된 것일 뿐이다. 성리학에서는 우주론적인 차원에서의 理․氣가 인간에 있어서의 性․心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녹문도 그러한 성리학의 이론 구조를 정면에서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心性一致의 전제로서 理氣同實을 이야기한 것이다.

  녹문의 관심은 본체론보다는 인성론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성론에서 녹문이 확립하고자 한 것은 心․性을 구분하지 않는 일원적인 心體이다. 따라서 녹문은 그와 같은 일원적인 심성론에서 거꾸로 유추하여 본체의 세계에 심체의 존재 근거가 되는 일원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종래의 성리학에서는 본체계에 존재하는 것은 理와 氣뿐이라고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녹문도 부득이 그가 요청한 일원적 실체를 理․氣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理氣同實’이라는 명제는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됐다. 하지만 녹문이 理氣同實로 표현한 일원적 실체는 종래의 二元的인 理․氣를 그냥 하나로 뭉뚱그려 놓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녹문은 심․성의 구분이 없는 인간의 통일적인 심체를 본체의 세계에 투영하여 그것을 우주의 일원적인 존재 근거로 삼은 것이다.

  녹문의 철학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모든 이론은 순수하면서도 활발하여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도덕적인 심체의 존재를 입증하고 그것을 바르게 보존하는 방법을 찾는 데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녹문 철학의 대요는 그의 동행 雲湖의 철학 이론 속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4. 思想的 特色


  운호의 저작에서는 녹문의 경우와 달리 理․氣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의 자취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운호의 문집이 너무 소략하게 역어져 그의 젊은 날의 글들이 산일되었기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와 같은 문제는 이미 형에 의해 결론이 난 것이며, 더우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 정립을 위한 과정상의 고민일 뿐 그들의 궁극적인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운호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문제시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운호는 理․氣의 문제에 대해 그것이 같으나 다르냐, 어느것이 우위냐를 따짐이 없이 우주의 一元的인 實體를 生物之心, 二氣의 良能, 湛一한 神明 등으로 자유롭게 호명하며, 그것이 곧 인간의 心體의 근원이 됨을 설명하였다. 


이른바 生物之心이라고 하는 것은 二氣의 良能이요 湛一한 神明이다. 天․人을 막론하고 이 하나의 神靈이 변화 속에 통투하여 萬理를 주제한다. 이것이 없으면 一原의 氣도 있을 수 없고, 이것이 없으면 萬殊도 있을 수 없다. 형체가 있기 이전에 존재하여 능히 氣의 어미가 되고, 형체를 갖게 된 이후에는 氣에 구속되지 아니한다. 하늘에 있다고 해서 남음이 있지 아니하고 사람에 있다고 해서 모자람이 있지 아니하다. [原註: 程子는 浩然之氣에 대해 天․人이 하나라고 하였다. 浩然之氣가 이와 같다면 神明이 하나임은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朱子가 말한 氣의 精爽은  이 원초적인 良能이 바른 줄기를 타고 [原註: 正通은 湛一의 바른 줄기요 良能은 그 神이다] 곧바로 내려와 영명하고 활발하여 천인의 구별이 없는 곳을 말한 것이지 형체가 생긴 후에 그 氣質 渣滓를 가리켜 논한 것이 아니다.14)


  운호의 이 말은 南塘 계열의 사람들이 性과 心을 각각 理와 氣에 분속시키고 그 중에서 心은 氣의 淸濁不齊로 인해 선천적으로 純․不純의 차별이 있다고 한 것에 대한 반론으로 언급된 것이다. 이 글에서 운호는 ‘心은 氣의 精爽’이라고 한 주자학의 心論을 전제로 삼으면서, 그 氣는 청탁부제한 末流 渣滓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本體의 湛一한 神明이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서 인간에게 墮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론의 틀은 성리학의 일반적인 理氣心性論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이미 理와 氣를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뜻이 없으며 혼륜한 하나의 실체를 본체로 상정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는 一元의 氣를 있게 하는 氣의 어미[氣之母]를 生物之心으로 칭하였는데, 그것을 또 氣의 良能이라고 하였다. ‘기의 어미’라고 하면 그것은 氣보다 앞선다는 뜻이 있지만, ‘氣의 良能’이라고 하면 그것은 氣에서 파생된 것 또는 氣의 속성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天地生物之心과 氣를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면 그와 같은 표현은 모순일 수 있겠지만, 운호의 생각 속에서는 이미 理와 氣가 영묘하면서 활성적인 하나의 神明으로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氣의 앞이라고 하든 뒤라고 하든 상관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운호가 이처럼 일원적인 본체관을 상정하게 된 것은 녹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心을 설명할 때 理․氣의 구별을 두지 않기 위해서였으며, 心을 말할 때 理․氣를 구별하지 않으려 한 것은 그것이 聖․凡의 구별 없이 순선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운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心과 性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性이 이와 같다면 心이 어찌 홀로 그와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  心이 만약 不善하다면 性이 어찌 홀로 善할 수 있겠는가?15)


  未發心體의 純善性 및 그것에 聖․凡에 걸쳐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陶庵 이후 낙론계 학자들의 일관된 입장이었으므로 운호가 왜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녹문이나 운호가 洛學의 지론인 心善說을 옹호하는 이론을 정립해 가는 가운데 心을 理․氣보다도 우선시하는 唯心論的인 색체를 강하게 띠기 시작했으며, 그 점에서 朱子學의 일반적인 理氣心性論과는 다른 독자적인 이론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물론, 心論에 있어서의 유심론적인 색체는 녹문이나 운호에 이르기 전에 외암이나 도암의 이론 속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찌기 남당 한원진은 외암의 심설에 그같은 요소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불교 내지는 육왕학에 견주어 실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남당의 그같은 비판은 외암이 남당을 荀卿․揚雄에 비긴16) 것에 대한 감정적인 비판으로서 객관성을 결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지적이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운호는 洛論의 心說을 옹호하는 자리에서 남당의 그같은 비난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塘翁은 자신을 荀․揚에 비긴 비난에 대하여 心善論을 佛敎의 本心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과연 공변된 말인가? 무릇 우리 儒家에서 말하는 心善은 본심이 지극히 맑고 더럽지 않기 때문에 능히 本性의 純善 無惡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未發의 때에는 조용하면서도 깨어있어 天下의 大本이 되고 已發의 때에는 바르고 반듯하여 만사의 紀綱이 된다. 천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내 마음의 體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세상의 사물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用이 관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本心이 과연 그러한가? 저것(佛敎의 心)은 자연을 宗으로 삼아 그것이 곧 마음이요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요, 이것(儒家의 心)은 理와 합일하여 惡을 변화시키고 善을 행하는 것이다. 心과 性에 똑같이 善이라는 글자를 붙였다고 해도 각기 가리는 바가 있으며, 유가와 불교가 똑같이 心이라는 글자를 썼어도 그 뜻은 실로 상반된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心도 선하고 性도 선하다고 하면 이는 근본을 두 가지로 하는 것이다”고 하였고 또 “心이 과연 지선하다면 心 자체가 바로 법도[矩]가 되고 仁이 된다. 어찌 ‘마음의 욕구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겠으며 어찌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佛敎에서 陸象山에 이르기까지 또 陸象山에서 王陽明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心을 宗으로 삼기를 일관되게 해 왔다”고 하여 心善의 논의를 異端의 부류에 귀속시켰다.17)

  

  운호가 洛論의 心說이 佛敎나 陸王學에 가깝다는 남당의 비난을 일부라도 긍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그런 면이 있다 하더하도 자가의 설이 이단이라는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들의 표면적인 주장을 좇는 데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그 실상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낙론의 심설은 성․범의 구별 없는 心의 純善性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 점만을 본다면 굳이 거기에 佛敎나 陸王에 가깝다는 혐의를 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심의 순선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심의 주체성이 강조되고 그것이 본체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면 心學에 가까와졌다는 지적을 부인할 수만은 없게 된다. 巍巖․陶庵의 설이 아직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맹아는 이미 싹트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녹문에 이르게 되면 심은 理․氣를 아우르는 하나의 실체로 간주되고 곧바로 우주의 본체와 상통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 상황에서는 남당의 비판이 전혀 무근하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운호는 靑山 縣監 시절 同學들의 도움을 받아 녹문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문집의 편찬에 참여한 학인들 사이에서 녹문의 저작 가운데 심학적인 색체가 드러나는 부문을 두고 논란이 야기되었다. 그 부분은 녹문이 만년에 자신의 수양론을 개진한 <存存龕記>라는 글과 도체를 논한 시 <心性雜詠>이었다.

  이 두편의 글은 모두 明의 유학자 景逸 高攀龍(1562-1626)의 저술에서 따온 내용을 담고 있는데 <存存龕記>에서는 내 마음의 性體․心體를 그침없이 보존[存存]하는 수양의 방법을 논하면서 本體와 工夫를 하나로 하는 本體卽工夫論을 피력하였으며,18) <心性雜詠> 속에는 本體工夫論을 논한 景逸의 글 <靜坐說>을 직접 인용하고 “진실로 체험에서부터 얻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친절하고 맛이 있을 수 있겠는가?”19) 등의 말로 극구 상찬하였다.  녹문의 本體卽工夫論은 인간의 수양 공부를 약동하는 道體의 부단한 유행의 연장으로 이해하여 心體․性體를 자연스럽게 보존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心을 활성적인 神明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우주의 본체와 동일시한 그의 本體論․人性論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景逸의 수양론을 크게 감복하여 받아들인 이유는 녹문의 철학이 이미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배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운호와 동학들 사이에서 이러한 글들이 문제시된 것은 일차적으로 景逸이 陽明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는 점이었다. 더우기 녹문이 경일에게서 영향받은 수양의 방법-本體卽工夫論은 涵養만을 강조하고 窮理를 가볍게 여기는 면이 농후하므로 心學의 영향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운호의 교우 士達 金相進(1736-1811)은 이 점을 간과할 수 없어 매우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였던 듯하다. 그 대체적인 내용은 운호가 또 한 사람의 교우 靜深 宋時淵에게 보낸 편지 글에서 살필 수 있다.


<存存龕記>는 형님께서 만년에 본원을 보고 신묘하게 깨달은 바인데, 士達이 그것을 빼버리고자 한 것은 괴이한 일입니다. 설사 조금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고 해도 당신께서 스스로 天機를 누설했다고 여긴 곳을 후인들이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빼버릴 수 있겠읍니까?20)


士達의 편지를 보니, 梁溪(高攀龍을 말함)를 배척함이 더욱 극심합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없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지나칩니다. 또한 文集(녹문의 문집을 말함) 가운데 梁溪의 말을 인용한 <雜詠> 5,6 편은 큰 근원에서 볼 때 서로 부합함이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므로 더욱 혐의를 둘 필요가 없는데, 사달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 ... 梁溪의 글 가운데 “朱子는 聖賢 豪傑이요, 陽明은 豪傑 聖賢이다”라는 등의 말로 나란히 칭하고 돌아가며 높인 것은 얼핏 보면 놀랍고 괴이하게 여길 만하나 그밖의 말들을 천천히 살펴보면 스스로 주재와 정견이 있으니 간절하게 존모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읍니다. 중국은 규모가 커서 우리나라와 같지 아니하며, 또한 陽明의 뒤에 태어나 온 세상이 한결같이 그를 우러르던 시기에 선배를 대우하는 도리로서 부득불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읍니까? .... 士達이 ‘豪傑 聖賢’등의 말만 보고 그를 陽明 일파로 모는 것은 털만 보고 말을 고르는 격입니다. 깊이 들어가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지나치게 배척하기만 하니 안타깝습니다.21)


  이상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운호는 녹문이 경일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렇게 대수로운 것이 아니며, 또 경일을 일방적으로 양명학자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함으로써 형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논의가 그 후 어떠한 방향으로 결말이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存存龕記>나 <心性雜詠>에서 인용한 <靜坐說>이 녹문의 문집에 그대로 수록된 것을 보면 운호는 경일을 존신한 녹문의 입장을 충실히 이해하여 그 뜻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녹문의 이러한 입장은 운호 개인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운호가 본체론이나 인성론에서 녹문과 마찬가지로 心을 중심에 두는 이론을 개진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다. 이제 문제시된 수양론의 부문에서 운호는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지를 알아 보기로 한다.

  운호는 수양의 문제에 있어서도 녹문의 입장을 계승하여 本體와 工夫를 일치시키는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宋時淵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本體工夫에 관해서는 모여서 논의해야만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저의 설 가운데 ‘머리를 곧게 하고 손을 공손하게 한다 .... 운운’ 한 것은 工夫와 本體가 원래 두 가지가 아님을 밝힌 것이지, 下學 節度에 있어 다소의 工夫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머리가 곧게 되고 손이 공손하게 된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의롭고 신하가 충성스럽다’고 하는 경우 의로움[義]과 충성스러움[忠]은 본체이며, 의로울 수 있고[能義] 충성스러울 수 있는 것[能忠]은 공부입니다. 또한 ‘아버지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성스럽다’고 할 경우 자애로움[慈]과 효성스러움[孝]은 본체이며 자애로울 수 있고[能慈] 효성스러울 수 있는 것[能孝]은 공부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만가지 일이 모두 그러하니, 이것은 ‘지름길을 좋아하고 빨리가기를 바라는 것’[好徑欲速]과는 취지가 다릅니다. 원래 本體와 工夫는 能․所의 구별이 있을 뿐이지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大德에도 본체와 공부가 있고 小德에도 본체와 공부가 있읍니다. 깊이 완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왜 병통이 되는지 알 수 없읍니다.22)


  운호가 정심에게 이 편지를 보내기에 앞서 그들 사이에 어떠한 논의가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운호가 본체와 공부를 하나로 하는 수양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정심이 그 내용을 의심하여 好徑欲速의 혐의를 두었다는 것은 단편적인 글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본체는 도체에 통하는 인간의 순수한 마음, 즉 性體․心體이며, 공부는  그러한 본체를 자연스럽게 보존하는 主一의 노력, 즉 敬의 공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본체와 공부를 하나로 한다는 것은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는 수양에 있어 인위적인 노력을 가하거나 의도를 품지 않고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양 이론은 이미 녹문의 <存存龕記>와 <主一銘>에서 제시된 것이며, 그것은 또 경일의 <靜坐說>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운호의 수양 이론은 <未發說>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물은 멈춘 이후에 고운 모습이 밝게 드러나며, 저울은 텅빈 이후에 무게의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여 그 體가 멈추고 텅비어 있지 못하니 그 用이 밝고 균형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제 그 體를 세워 그 用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밤낮으로 사물을 접하는 틈새에  항상 자연스럽게 뜻을 두고 묵묵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여 거두어들이고 이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고요해지고 공부가 완숙해져 志氣가 견고해질 정도가 되면 편안함에 이르게 되고 다시 망녕된 움직임이 없게 되니 그러한 연후에 이 마음이 우뚝 서게 된다.  .... 가볍고 가볍게 거두어 들이는 것[輕輕收斂]은 움직임을 거두어 고요함으로 돌리는 방법이며, 간략하고 간략하게 이끄는 것[略略提撕]은 혼미한 것을 밝혀 깨달음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보통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데 익숙하고 어지러워 정해진 곳이 없다.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未發의 때를 만들 수 없으니 그것은 곧 잊어버림[忘]이다. 하지만 마음은 活物이기 때문에 의도를 가지고 강하게 붙들어서는 안된다. 강하게 붙들면 구속받고 각박하여져 助長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볍게 하라는 것이다. 또 보통 사람의 마음은 오랫동안 혼탁해 있어서 일정하게 붙들었어도 의지를 가지고 이끌지 않으면 도리어 졸음에 빠지게 되니 이것도 곧 잊어버림[忘]이다. 그러나 마음을 이끄는 데 힘을 소비하면 의도를 품게 되어 已發이 된다. 已發 또한 助長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략하게 하라는 것이다.23)


  이 글에서 운호는 未發工夫의 방법을 자연스럽게 의도를 품지않고 마음의 순수함을 찾아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잊지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 것[勿忘, 勿助長]은 미발공부의 가장 중요한 요체이다. 보통 사람의 마음은 氣質 末流의 渣滓를 입어 분주하고 혼탁하기 때문에 수양의 처음 단계에서는 부득이 의도적인 노력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한 집중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인 잊어버림[忘]이다. 하지만 미발공부는 원래 순수한 본연의 신명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함이지 그것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므로 강한 의지를 써서는 안된다. 마음을 붙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인위적인 노력을 가하게 되면 그것은 助長하는 것이 되어 본체의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운호는 이와 같은 미발시의 涵養工夫가 수양의 우선이며 已發時의 窮理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涵養工夫를 논한 후에 “오직 涵養을 하게 되면 氣가 일정해지고 정신이 깊어져 책을 보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저절로 면려하여 밝힐 수 있으니 지난날 알았던 것의 의미가 저절로 각별해질 것이요 깨달았던 바도 뜻밖에 깊고 자세해 질 것이다”24)고 하였다. 궁리는 함양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 효과를 배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함양공부를 하지 않으면 志氣가 일정하지 않아 항상 氣(渣滓 末流)의 용사가 있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사물을 접하면서 그것의 마땅한 바를 구하려 하여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함양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25)

  涵養工夫는 정통적인 주자학에서도 중요시되는 것이므로 운호가 함양을 그토록 중요시 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주자학적 수양론의 두 지주인 涵養과 窮理의 균형을 깨뜨리고 함양을 일방적으로 앞세운 데에는 녹문으로부터 받은 본체공부론의 영향이 없지 않은 듯하다. 또한 녹문의 수양론이 전적으로 경일 고반룡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상기하면 운호 역시 그 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녹문이 경일의 철학적 성격 및 자기가 그에게서 받은 영향에 대해 얼마만큼 객관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는지를 알 도리는 없지만, 적어도 운호는 교우들의 문제 제기를 통해 경일이 심학에 경도되었다는 사실과 녹문의 본체공부론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심학에 대한 운호 자신의 입장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운호의 저작 속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녹문의 문집 속에 이 문제와 관련된 흥미로운 글이 발견되므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운호의 나이 44세 때 그가 녹문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녹문이 답신으로 쓴 것이다.


양명과 백사는 비록 이단이기는 하나 걸출한 인물이며, 그들의 말 가운데에는 신기하고 고묘한 것이 많아 족히 사람들을 용동시킬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오늘날까지 온 세상에 영향력을 크게 떨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이 마음씀이 가장 가장 세심한 곳은 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요, 그들의 말 가운데 가장 오묘한 곳은 바로 해악이 가장 심한 곳이다. 지금 너의 편지를 보니 그것들을 좋아함이 너무 심한 듯하니 그 독에 빠진 것은 아니냐?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함에 염증이 느껴진다면 程子의 글을 익히 읽을 일이지 어찌 저들에게서 구하느냐?26)


  매우 단편적인 글이므로 이것만을 가지고 心學에 대한 운호의 입장이 어떠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만을 보면 녹문은 매우 완강하게 王守仁이나 陳獻章을 이단시했음에 반해, 운호는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이것은 운호의 학문이 완숙기 접어들기 전에 일종의 稚氣에서 온 호기심의 소산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朱子學과 陽明學을 넘나든 그의 폭넓은 소양이 여러가지 복잡한 요소를 안고 있는 녹문의 철학을 정확하게 소화하여 자기화하는 데 보탬이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지도 한다.



5. 맺음말


  지금까지 雲湖 任靖周의 저술에 담겨 있는 그의 성리학 이론을 녹문의 철학과의 연관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머리말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운호의 사상과 녹문의 사상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운호의 철학에서 특별히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거꾸로 운호를 통해 녹문 철학의 요채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객관적인 사물의 원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마음을 本體로 여겨 직접적으로 그것을 깨닫는 공부를 중요시 하였다는 것이다.    녹문의 철학을 氣一元論 또는 唯氣論이라고도 칭하지만 그것은 물질적 또는 현실적인 세계를 중시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氣로 설명되는 마음(心은 氣의 精爽이라고 하는 점에서)을 중시했다는 뜻이다. 이 점은 녹문의 철학 그 자체에서도 드러나는 바이기는 하지만, 녹문을 계승한 운호의 이론 속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철학에서 理․氣를 둘로 보는 견해가 배척되고 그것이 한 가지로 추구된 것은 理․氣의 合이라고 이야기되어 온 心의 위상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높이고자 한 의식의 소산이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그들의 理氣心性論의 귀결점인 수양론에서라고 할 수 있다. 녹문은 事事物物에 대한 궁리의 과정을 번거롭게 거치기보다는 심체에 곧바로 주력하는 본체공부론을 강조하였는데, 운호는 형의 본체공부론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그 나름대로 미발공부론을 피력하여 미발 상태의 심체를 함양하여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녹문과 운호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이같은 특징들은 理․氣의 문제나 純粹理인 본연지성보다는 인간의 주체성인 心을 중시했다는 점으로 모아질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면이 우연히도 육왕의 심학에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 흥미롭게 여겨진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녹문이나 운호 모두 스스로는 성리학을 고수하는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며 어느 면에서라도 심학을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은 心을 강조하고 그것의 위상을 높이다 보니 부분적으로 心學에 가까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 녹문과 운호의 차이점을 지적한다면 녹문은 자기의 철학에 그러한 색체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완강하게 심학을 거부했던 반면, 운호는 그 점을 어느정도 인식했기 때문에 심학에 대해서도 비교적 융통성 있는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 張志淵, <<朝鮮儒敎淵源>> 第41節 吳熙常 外 諸公


2) 玄相允, <<朝鮮儒學史>>  13-4 主氣派의 發達 (서울 현음사, 1982)


3) 張志淵, 위의 책


4) 오늘날의 황해도 송화군


5) 中宗 元妃 端敬王后 愼氏의 능, 경기도 일산 소재


6) 오늘날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7) 韓元震, <擬答李公擧>, <<南塘集>> 권11 書, 9b


8) 韓元震, <上師門>, <<南塘集>> 권7 書, 18a


9) 韓元震, <與沈信夫>, <<南塘集>> 권15 書, 19a - 19b


10) 李柬, <上遂菴先生>, <<巍巖遺稿>> 권4 書, 33b


11) 李柬, <未發辨>, <<巍巖遺稿>> 권12 雜著, 26b


12) 李縡, <答尹瑞膺>, <<陶庵集>> 권10 書, 18b


13) 任聖周, <答李伯訥>, <<鹿門集>> 권5 書, 6a


14) 任靖周, <與金領府論韓南塘心說>, <<雲湖集>> 권1 書, 11a-24a


15) 위와 같음


16) 李柬, <上遂庵先生>, <<巍巖遺稿>> 권4 書, 35b


17) 任靖周, <與金領府論韓南塘心說>, <<雲湖集>> 권1 書, 11a-24a


18) 任聖周, <存存龕記>, <<鹿門集>> 권20 記, 51b


19) 任聖周, <心性雜詠>, <<鹿門集>> 권26 詩, 21b-22a


20) 任靖周, <與宋靜深>, <<雲湖集>> 권2 書, 3a-3b


21) 任靖周, <與宋靜深>, <<雲湖集>> 권2 書, 3b-4b


22) 任靖周, <答宋靜深>, <<雲湖集>> 권2 書, 2a-2b


23) 任靖周, <未發說>, <<雲湖集>> 권5 雜著, 1a-4a


24) 위의 글


25) 위의 글


26) 任聖周, <答舍弟穉共>, <<鹿門集>> 권10 書, 22a-22b